불교공부

[경전해설] 부증불감(不增不減)

원강유통 2024. 1. 15. 17:47

:: [경전해설] 부증불감(不增不減)

공의 모습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 는 부증불감의 속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현상계의 물질, 정신적 모든 존재는 양(量)적으로 상대적인 개념을 초월하여 무한한 존재로서 원만 구족한 성질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본래 물질에는 내 것, 네 것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이것은 내 것’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울타리를 치고 있기에, 그 울타리 안에 있는 것만 내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내 것을 누군가에게 보시하면 아깝고, 손해 보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무소유와 나눔이 오히려 전체를 소유하는 것이라는 진리를 외면한 채 살아가는 삶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무소유를 통해 전체를 소유한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모든 존재가 가진 본성의 원만 구족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모두 행복하고, 부유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돈의 많고 적음이 그를 부유하고 가난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족과 소욕의 정신이 우리를 부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나다’, 혹은 ‘너다’ 하고, 너와 나를 갈라놓고 나만을 위해 살아가는 아상(我相), 아집(我執) 때문에 ‘내 것’이라는 관념이 생긴 것입니다. 아상이 없는 곳에 네 것, 내 것은 없습니다. 내가 없는 마당에 어디 내 것이라는 소유 관념이 붙을 수 있겠습니까? 아상을 깨고 보면 ‘내 것’이 사라집니다. ‘내 것’이 사라졌을 때 이 우주 법계의 모든 것이 다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 백만원의 돈이 있다고 합시다. 이 돈은 많은 돈입니까, 아니면 적은 돈입니까? 이 백만원은 한없이 가난한 각지의 불쌍한 가정에서라면 수억원과도 맞먹는 값어치가 있으며, 대재벌에게 있어서라면 우리가 생각하는 몇 천원, 몇 만원과도 같은 적은 돈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같은 백만원이지만 인연 따라, 어떠한 이에게 주어지는가에 따라 한없는 양의 돈이 되어 늘어날 수도 있으며 반면에 줄어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마음에 따라, 그리고 상황에 따라 늘고 주는 것이지, 백만원이라는 돈 자체에 어떤 증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연기법의 세계에서 본다면, 공성의 세계에서 본다면 부증불감인 것입니다.

이렇듯, ‘내 것’이라는 소유도 부증불감의 세계에서, 공의 측면에서 보면 증감이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좀 더 넓게 보아 내 것이 사라진다는 것은 다른 이의 것이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좀 더 쉬운 비유를 든다면, 내가 돈 만원을 가지고 있을 때, 오천원을 배우자에게 준다면 내 돈은 줄어들었지만, 배우자의 입장에서는 돈이 늘어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가족 전체로 본다면 부증불감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나와 배우자를 가르는 마음이 있다면 당연히 증감이 있게 마련이며, 배우자에게 오천 원을 주었을 때 괴롭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배우자와 나를 가르는 마음이 없습니다. 둘은 하나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바로 이 ‘하나’라는 생각이 있다면 부증불감이며, 내 것이 없어져도 괴로울 것이 없습니다. 내 것이 곧 배우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좀 더 확대하여 우리 사회 전반에 관련지어 보겠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회 전체를 우리의 가족처럼 ‘하나’라고 생각했을 때 , 즉 사회와 ‘나’를 가르는 마음이 없고 ‘하나’라는, ‘동체(同體)’라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에게는 ‘내 것’이라는 소유욕이 사라집니다. 내 것이 바로 사회의 것이고, 사회의 것이 바로 내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너라는 분별심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지향점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나와 너를 가르지 않는 마음, 즉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끊어버리는 것을 수행의 궁극으로 보는 것입니다. 금강경에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상이 상이 아님을 본다면 여래를 볼 것’이라고 한 부분을 주시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상이란, 바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네 가지 상을 말합니다.

사상(四相)의 기본은 아상에 있으며, 아상이 있기에 인상이 있는 것입니다. 즉, ‘나다’ 하는 상이 있기에 ‘너다’ 하고 가르는 상이 생기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불교 가르침의 핵심은, 바로 ‘나’와 ‘너’를 가르지 않는 마음, 즉, 우리 전체가 일체로서의 하나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늘어나고 줄어드는 개념은 사라집니다. 내 것이 줄어들면 다른 이의 것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이가 나와 다르지 않거늘 무엇이 줄어들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하나’의 가르침이 바로 불교의 핵심입니다. 불교를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고 했을 때, 지혜는 ‘하나’의 진리를 통찰할 수 있는 지혜를 말하며, 자비는 너와 내가 진정 ‘하나’가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실천행인 것입니다.

 

-법상-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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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以無所得故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이무소득고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罫碍 無罫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縟多羅三貘三菩提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故知 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고지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故說 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3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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